배경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역사적 배경은, 15세였던 광해군의 통치 시절은 17세기 초반의 조선시대이다. 이 시기는 조선의 역사에 중요한 변화와 혼란이 동시에 일어나 민란과 외교적 갈등이 많았던 격변의 시기였다. 광해군 집권 당시에 조선은 명나라와의 외교적 갈등이 심했다. 조선은 명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려고 했지만, 이는 조선과 명의 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은 일본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했지만 이 마저도 어려움이 많았다. 내부적으로는 사대부 정치가 탄생했으며 이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대부정치가 본격화 되며 조선의 정치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외에도 국민들의 굶주림, 질병 그리고 민란 등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이런 문제들은 광해군의 통치를 어렵게 만들었으만 왕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사실과 허구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영화적 허구가 가미된 영화이다.
17세기 초 조선시대의 15대 왕 광해군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광해군은 조선의 노예제도 폐지와 같은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으며, 영화는 광해군 통지 기간 중의 조선의 정치적, 사회적인 상활을 다룬다. 특히 왕과 신하들 간의 권력 다툼과 음모를 중점적으로 다루며 실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당시에 실존했던 인물을 적용하여 승정원일기에서 지워진 15일 간의 시간에 광해군으로 위장한 왕이 왕의 역할을 대신하여 조선을 다스렸다고 가정하며 상상으로 이야기는 풀어나간다.
광해군
1608년~1623년간 조선을 다스셨던 조선의 제15대 왕이다. 임진왜란 기간 중 여러 지역을 돌며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하는 등 적극적인 분조활동을 전개했다. 서울을 수복한 후에는 수도 방위를 위해 힘을 기울였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남부지방으로 내려가 군사들을 독려하고, 백성의 안위를 돌보는 등 임진왜란 기간 동안 국가의 안위를 위해 노력하였다. 선조가 사망 후 임진왜란 동안 많은 공을 세운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영창대군과 많은 갈등을 빚었으며,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등 서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국 서인들이 주도한 반정에 의해 폐위당했다. 이 것을 인조반정이라고 한다. 폐위되기 전까지 그는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인 확보를 위해 대동법과 양전을 실시하였으며,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한성부의 질서 회복을 위해 창덕궁을 중건하며, 경희궁과 인경궁을 준공하는 등 궁궐 조성에 힘썼다. 그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가를 재건하는데 주력했으며, 허준을 통해 동의보감의 편찬을 마무리했다. 또 당시 조선을 둘러싼 대외관계 속에서 실리외교를 지향하는 자세를 보였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다른 왕들처럼 묘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묘효는 국상을 마친 뒤 신위를 종묘에 안치할 때 분여지는 이름이다.
흥행성적 및 드라마
<광해, 왕이 된 남자>는 2012년 최고의 영화로 꼽히며, 제49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총 15관왕에 올라 많은 상을 싹쓸이 하게 된다. 또 대중성까지 겸비하며 누적 관객 1200만을 넘기며 천만관객을 돌파했다. 관객 평점 또한 9점 이상으로 매우 높았다. 주연 배우인 이병헌과 류승룡의 연기 또한 호평을 많이 받으며 몇 번씩 다시 보는 관객들도 있었다. 스토리 전개부터 영상미, 연출, 배우들의 연기까지 호평을 받으며 완성도 높은 영화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표절이라는 논란도 있었으나, 배우들의 연기력과 높은 완성도로 영화는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영화는 드라마로도 리메이크되었다. 다만 드라마에는 광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고, 드라마 속 광대가 왕의 역할을 잘 해내며 중전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영화와는 이런 점이 다르지만 드라마 또한 영화처럼 배우들이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며 많은 호평을 받았고, 거기에 아름다운 영상미까지 더해지며 당시 TVN 역대 드라마 시청률 8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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